• 로그인
  • 회원가입
    1. 암 예보(서울) : 좋음
      미세먼지(서울) : 마스크 미착용
    2. 암 예보(부산) : 좋음
      미세먼지(부산) : 마스크 미착용
    3. 암 예보(대구) : 좋음
      미세먼지(대구) : 마스크 미착용
    4. 암 예보(인천) : 좋음
      미세먼지(인천) : 마스크 미착용
    5. 암 예보(광주) : 좋음
      미세먼지(광주) : 마스크 미착용
    6. 암 예보(대전) : 좋음
      미세먼지(대전) : 마스크 미착용
    7. 암 예보(울산) : 좋음
      미세먼지(울산) : 마스크 미착용
    8. 암 예보(경기) : 좋음
      미세먼지(경기) : 마스크 미착용
    9. 암 예보(강원) : 좋음
      미세먼지(강원) : 마스크 미착용
    10. 암 예보(충북) : 좋음
      미세먼지(충북) : 마스크 미착용
    11. 암 예보(충남) : 좋음
      미세먼지(충남) : 마스크 미착용
    12. 암 예보(전북) : 좋음
      미세먼지(전북) : 마스크 미착용
    13. 암 예보(전남) : 좋음
      미세먼지(전남) : 마스크 미착용
    14. 암 예보(경북) : 좋음
      미세먼지(경북) : 마스크 미착용
    15. 암 예보(경남) : 좋음
      미세먼지(경남) : 마스크 미착용
    16. 암 예보(제주) : 좋음
      미세먼지(제주) : 마스크 미착용
    17. 암 예보(세종) : 좋음
      미세먼지(세종) : 마스크 미착용

아이디 / 비밀번호 찾기

회원가입으로 더 많은 혜택을 누려보세요.
올캔서 회원가입 하기

노벨사이언스

Home>암정보센터> 노벨사이언스

인류의 최대 과학 공헌자 - 아인슈타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자 : 올캔서 댓글댓글 : 0건 조회조회 : 552회 작성일작성일 : 17-07-14 18:52

본문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업적

 

544_1111_2937.jpg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수식화(E=mc2)하고, 공간⦁시간⦁중력에 관한 획기적인 이론들을 과감히 도출해 냈다. 무엇보다도 상대성원리라는 중력에 관한 탁월한 이론을 창출함으로써 과학적 탐구의 기반을 구축한 공로로, 아인슈타인은 1921년(43세)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아인슈타인은 1900년 초에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베를린의 스위스 특허사무소 심사관으로 근무하면서 1905년 공신력 있는 〈물리학 연보〉에 걸출한 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들 중에는 그 동안 혼돈스러웠던 인간의 우주에 대한 견해를 일거에 바꾸어버린 상대성이론이 포함되어 있고, 물질입자가 엄청난 양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는 에너지-질량 방정식에 관한 가설이 포함되어 있어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제조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1933년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집권으로 민중에 대한 극심한 압제가 시작되고,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가 극심해지자 아인슈타인은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미국 프린스턴으로 피신하여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원자폭탄 등 대량 살상무기의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프린스턴 연구소에서 여생을 보냈다.
 
아인슈타인의 성장기

544_1124_4932.jpg
어린시절의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03.14.~1955.04.18.)은 1879년 독일의 소도시 울름에서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독일계 유대인 후손, 1847~1902)과 어머니 파울리네 코흐(세르비아인, 1858~1920)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인슈타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그의 가족은 뮌헨으로 옮기고 아버지와 숙부인 야코프 아인슈타인은 전기화학 공장을 경영하였다. 유년 시절의 아인슈타인은 4살까지도 말을 어눌하게 할 정도로 지진아였 고, 9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깨우칠 정도로 비교적 발육이 느린  아이였으며, 성격도 활달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5살 때 아버지가
 선물로 준 나침반의 흔들흔들 움직이는 자침의 배후에 인력을 초월 한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써, 훗날 자연 법칙의 탐구에 큰 업적을 남길 과학자로서의 기질이 이때 이미 그  싹을 보였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이 때의 경험이 자신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쓰고 있다. 1885년(6세), 뮌헨의 카톨릭 초등학교 에 입학했으나 엄격한 권위주의적 교육에 흥미를 잃었고, 1888년에  입학한 뮌헨 루이트의 김나지움(Luitpold Gymnasium)에서는 자신 이 좋아 했던 수학과 라틴어 공부에 몰입했다. 12세 무렵에 처음으 로 접한 유클리드 평면 기하학의 매력에 매료되었던 아인슈타인은 어린시절의 아인슈타인ⓒWikipedia 이 때 이미 물리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이공학적 천재의 기질을 다져나갔으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를 못하고 김나지움을 중퇴했다. 16세 무렵까지는 미⦁적분을 독학으로 익혔으며, 이 무렵부터 베른시타인(Bernstein)의 통속과학대계를 공부하면서 자연현상과 그 법칙에 대해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1894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족들이 밀라노로 옮기게 되어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1896년(17세)에 명문 취리히(Zurich)의 연방공과대학교에 입학한 후, 헝가리에서 유학 온 홍일점 수학천재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와 사랑에 빠졌으며, 아인슈타인은 이 대학에서 4년간 물리학 및 수학 공부에 몰입하였다.

‘기적의 해’와 탁월한 연구 업적

1900년(21세) 봄날, 대학을 졸업한 후 스위스 시민이 되었으나, 제때 취업이 되지 않아 가정교사로서 수학을 가르치며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고 이듬 해,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사무소에 취업이 되었다. 1903년(24세)에 대학시절의 애인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을 했는데,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밀레바는 1895년, 세계적인  특허청 재직시의 아인슈타인ⓒWikipedia 명문 취리히연방공과대학에 여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입학 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여성 물리학도였다. 결혼 후, 아인슈타인과 밀레바ⓒWikipedia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연구를 할 때 수학과 관련된 부분은  부인 밀레바의 도움을 받았고 연구도 함께 진행했으며, 1904년에는 장차 수력공학자로 성장하게 될 장남 한스 알베르트(1904~1973)를 낳았다. 1905년(26세)은 아인슈타인의 생애에서 잊

544_1117_2938.jpg
밀레바와 두아들

을 수 없는 ‘기적의 해’ 해였다. 그 해 초 취리히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학위논문: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 A New Determination of Molecular Dimensions’) 하였고, 그 해 봄날, 아인슈타인은 공신력 있는 월간지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첫 번째 논문(3월 발표)은 훗날(1921년) 그에게 노벨물리학상의 영예를 안겨주고 오늘날까지도 유용하게 쓰이는 광전효과 (‘빛의 발생과 변환에 관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관점에서’)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논문을 통해 그는 빛의 광전효과를 설명하였고 과학계로부터는 고전 양자론을 태동시켰다는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를 받았다.
두 번째 논문(5월 발표)은 초미세 원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밝혀준 브라운 운동(‘정지액체 속에 떠있는 작은 입자들의(열의 분자운동론에 의한) 운동에 관하여’)으로 분자의 존재와 분자의 열운동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분자물리학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세 번째 논문(6월 발표)은 훗날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전 세계에 드러내게 될 공간과 시간이 서로 독립적이 아니라,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물체의 움직임이 상대적이라는 특수상대성이론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관하여’)이었다. 이 개념은 뉴턴 시대 이후로 물리학자들이 장고해 오던 난제를 일거에 해결함으로써 시⦁공간의 개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으며,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확립한 '질량과 에너지의 E=mc2에 따라, 모든 질량은 그에 상당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그 역 또한 성립한다 는 개념(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진공 속에서의 빛의 속도)을 정립했다. 이 이론은 훗날 원자력의 기반이 되었으며, 천재 아인슈타인을 유럽의 저명한 물리학자 반열에 당당하게 올려놓았다. 

네 번째 논문(9월 발표)은 (6월 논문의 후속 편) 훗날 원자탄 개발의 이론적 근거가 된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유량에 의존 하는가’)에 관한 논문으로, '중력의  장방정식'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의 완결된 장방정식을 최초로 구현하였다.
이상과 같은 4편의 논문들은 19세기 물리학의 난제들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인간의 우주에 대한 생각을 명확하게 정립했다는 전 세계 과학계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학계 진출과 왕성한 연구 활동

544_1118_2938.jpg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1906년, 아인슈타인은 베른 특허사무소의 2급 심사관으로 승진하였으나, 그가 갈망하던 안정적인 연구생활을 위해 이듬해 베른대학의 교수초빙에 지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30세 되던 1909(30세)년에 취리히공과대학 이론물리학부  조교수로 취임을 하게 되어 베른 특허 사무소를 사직했다.  원하던 대학에 진출하여 연구와 학생 지도에 몰두하게 된  아인슈타인에게는 1910년 차남 에두아르트(1910~1965: 훗 날 정신분열증을 앓음)가 태어나게 되어 아들만 둘인 가정 의 가장이 되었으나 대학의 급료가 크게 달라지지 않아 생 활에 여유가 없었다. 같은 해에 빌 헬름 오스트발트가 아밀레바와 두 아들ⓒWikipedia        인슈타인을 노벨물리학상 후보로 추천했다. 이듬해인 1911년 (32세)에 프라하대학 이론물리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지는 현상 예측’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봉급도 많고 학교의 환경 등에는 만족했으나, 학생 지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어 연구할 시간은 크게 부족했다. 이듬해, 베를린을 여행하던 중 육촌 누이 엘자 뢰벤탈을 만나게 되면서 부인 밀레바 마리치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그 해 겨울에는 모교인 ETH 취리히공과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로 취임했으며, 1913년(34세) 베를린대학 교수 겸 프로이센과학원 교수로 선출되었다. 1914년에는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에 자리를 잡고 베를린에 머물면서 가끔 베를린대학교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으며, 드디어 일반상대성이론의 측지선공식에 대한 최초의 형식화인 '일반상대성이론의 형식적 기초'를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인슈타인은 가족을 뒤로 하고 "새조국연맹"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반전성명서를 발표했다.

 

1915년(36세), 아인슈타인은 4편의 논문 중 마지막인 '중력의 장방정식'에서 마침내 일반상대성이론의 완결된 장방정식을 최초로 구현했다. 시∙공간이 서로 얽혀있다는 상대성이론은 과학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지만, 과학에 대해 문외한들인 기자들이 선정적이고 왜곡된 보도를 함으로써 그는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나,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16년,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 기초; Die Grundlagen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대중 해설서라 할 수 있는 데, 중력이란(뉴턴이 주장한 것과 같은 힘이 아니라) 시⦁공 연속체 속의 질량의 존재에 의해 생긴 굽어진 장(場)이라는 것이다. 같은 해에 우주론 등에 대한 10여 편의 논문을 더 발표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에 취임하였으나, 그 동안의 과로 탓으로 위암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 때 육촌누이 엘자 뢰벤탈의 지극한 간호의 덕택으로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되고, 헌신적인 엘자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되어 부인 밀레바와는 더욱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18년 세계 1차 대전이 끝나면서 밀레바와의 관계도 끝나게 되었다. 이혼 조건으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수상할 경우 상금을 밀레바에게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3년 뒤 아인슈타인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약속대로 상금 모두를 밀레바에게 주었다.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세계적인 명성을 얻다

544_1114_2937.jpg

1919년(40세)은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가정적으로는 그의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이혼하고, 결혼에 한번 실패한 5촌 당숙의 딸 엘자와 재혼했으며, 같은 해에 그의 업적은 광범위하게 평가되어 쟁쟁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때 런던 왕립학회는 기니만에 있는 프린시페 섬에서 있었던 과학탐사에서 5월 29일의 일식을 촬영했으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예측을 검증시킨 계산 값들을 완성해 냈다고 공표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상대성이론의 기본 가설들이 대단히 혁명적이고 획기적이라고 생각했으며, 과학계는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천재 과학자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당시, 독일 베를린에서는 반유   대주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의 볼 셰비키주의자' 범주로 몰리게 되었다. 그가 시오니즘 운동 을 대중적으로 지지하였기 때문에 우익집단들은 그의 사상 에 대해 크게 격노했다.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에서의 격난 을 피해 유럽의 다른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상대성이론을  강의했는데, 그는 항상 3등 열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의 곁 에는 늘 바이올린이 함께 했다. 1920년대의 시끄러운 상황 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연구, 즉 전자기와 중력 사이의 수 학적 관계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의 생 각에 이것은 전자로부터 행성까지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바이얼린을 즐겼던 아인슈타인ⓒWikipedia 것의 작용을 지배하는 일반법칙을 발견하는 첫 단계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단일한 방정식이나 공식으로 물질과 에너지의 보편적 속성들을 연관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나중에 통일장이론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훗날 성과 없는 노력으로 평가받게 된다. 당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양자이론은 입자의 운동에 대한 모든 측정에서의 불확정성원리를 밝혀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탁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이 일반상대론에 맞설 수 있다는 관념을 강하게 거부했다. 1921년(42세)은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광의 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상하이[上海]에 머물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은 한통의 국제전보를 받았다. 전보 내용은 ‘당신의 광전법칙과 이론물리학 분야에서의 업적으로 당신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1905년에 발표한 빛과 양자에 관한 이론(광전효과)이었으며, 상대성이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드디어 그는 영광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고, 세계적인 물리학자로서 그 명성을 전 세계에 날리게 되었다.

양자역학의 거부와 통일장 이론의 추구

 
544_1123_4653.jpg
닐 보어와 아인슈타인

1922년(43세)부터는 당시 한창 정립되던 양자론에 대해 일부 과학자들이 물리현상을 확률적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아인슈타인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으며, 양자론을 인정하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은 이 후 평생을  통일장이론을 연구하는 데 몰입했다. 원자와 같은 미시세계의 법칙 과 우주와 같은 거시세계의 법칙을 하나의 이론적 틀로 묶어보려는  시도였으나 실패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결국은 주류 과학계와는 멀 어지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 정착한 이후로 그는 이스라엘의 독립 과 원자탄 개발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문제에도 관여하기 시작 했다.  이즈음 그는 프랑스, 싱가폴, 홍콩,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스웨덴  등 10여개국을 대상으로 순회강연을 하는 등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서의 광역 활동에 열중했다. 1925년에는 남미에서 ‘보스-아인슈타 인 통계’,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이론’ 등을 개발하는 성과도 달성닐 보어와 아인슈타인ⓒWikipedia 했다. 1927년(48세), ‘제 5차 솔베이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보어와 양자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시작했다. 사실 그는 광양자설을 통해 양자역학의 초기 기반을 닦는 데 크게 기여를 했지만, 본인 스스로는 양자역학을 완전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해 제창된 코펜하겐 해석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수년에 걸쳐 보어와 논쟁을 하면서 ER역설 등의 사고 실험을 제기하며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을 폐기하려 노력했다. 이 후 두 석학의 격렬한 논쟁은 수많은 후배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의 개념적 기반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결국 시간이 흘러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연구를 떠나 통일장이론 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1929년 상대성이론을 완성한 후에도 아인슈타인은 자연의 법칙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전자기장은 분명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이 법칙을 통일장이론(unified theory of field)이라고 불렀다. 그는 통일장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통일장이론의 목적은 가능한 최소의 가정과 공리로부터 최대의 경험적 사실을 논리적 추론으로써 포괄하려는 것이다." 라고 통일장이론을 발표하였으나, 후에 그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철회 하 였으며, 이후 동일한 연구를 계속했으나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는 못했다. 1931년, 옥스퍼드대학교에 교 환교수로 가게 되었고, 이 때부터 많은 시간을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활동에 할애하였다.
 1933년(54세),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의 교수직을 사임하 고, 미국을 방문하던 중에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 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 시민권을 포기한 채 프린스턴대 학교 고등연구소 수학과정 교수로 취임했다. 그 후 나치주 미국 시민권을 받는 아인슈타인ⓒWikipedia 의자들에게 그의 전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출가한 그의  두 딸들도 독일을 벗어나 인근 국가로 이주했다.

미국에서의 노년 생활

544_1116_2937.jpg
미국 시민권 벋고 있는 아인슈타인

1933년부터 시작된 미국 프린스턴에서의 20여년 생활은 평온하였다. 그는 소박한 2층 목조가옥에서 아내 엘자와 생활했으며, 아침마다 산책을 하거나 연구소까지 걸어 다녔다. 연구소에서는 통일장이론을 연구했고 동료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다. 몇 년 후 아인슈타인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자신이 유럽인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나치 과학자들이 '원자탄'을 최초로 만들 것이라는 공포감으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 자탄 제조는 경계를 해야 하며 만일 필요하다면 빠른 조치 를 취하라"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 에게 했던 권고는 맨해튼계획의 시작을 의미했다. 1935년,  Physical Review라는 물리학회지에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즌(Einstein-Podolsky-Rosen) 패 러독스’라는 획기적인 논문 한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운 동상태에 대한 양자역학의 기술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  이었는데, 당시 발표한 실험 내용은 실제로 이루어진 실험 이 아니라, 일종의 가상적인 사고실험이었다. 이로 인해 전노년의 아인슈타인ⓒWikipedia  통물리학의 세계관이 뒤흔들렸고, 결국 후진들의 열띤 논쟁과 연구 열기를 불러일으킨 결과가 되었다.
1940년(61세), 히틀러의 세력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서한을 보냈고, 이 서한을 계기로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히로시마[廣島]가 괴멸될 때까지 핵분열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아인슈타인은 심한 충격과 강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즉시 미래의 원자탄 사용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던 과학자들과 합류했고, 그의 긴급한 탄원은 미국⦁영국⦁러시아가 합의한 세계정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그는 나머지 생애 동안 대량살상무기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1948년(69세), <일반화된 중력이론>을 발간하고, 그 후 <자전적 노트>, <나의 최근 이야기> 등을 연달아 발간했다. 1952년,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인 와즈만이 물러난 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대통령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단호히 사양하고 과학자의 길을 고수했다. 세기의 거인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8일 76세를 일기로 프린스턴 병원에서 ‘동맥류로 인한 복부 대동맥 파열’이라는 병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이스라엘 독립일에 대해 기록한 미완성의 언명들이 적혀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었다. "내가 성취하고자 추구했던 것은 단지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진리와 만인을 위협하는 가공할만한 위험에 대한 정의에 봉사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인간의 우주관에 대해 세계 과학계의 거인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정치는 순간을 위한 것이지만, 방정식은 영원을 위한 것이다"

참고문헌

1)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MacTutor History of Mathematics Archive》(영어). 세인트앤드루스대학
3) ‘나의 세계관’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신일철 번역, 서문당, 2014
3)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네이버캐스트
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5)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다음)
6)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수학 계보 프로젝트 (미국 수학회)
7)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파인드 어 그레이브
8)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토머스 레벤슨, 해냄출판사, 2005.04.15.
9) ‘Albert Einstein (1921)’ : “Nobel Lecture”
10) ‘Works by Albert Einstein’ : (public domain in Canada)
11) Einstein A to Z :  Karen C. Fox, Aries Keck : Jon Wiley & Sons. Inc (2004)
12) Einstein : His Life and Universe, Walter Isaacson, Simon & Schuster(2007)
13) Albert Einstein : The Incorrigible Plagiarist, Christopher Jon Bjerknes (2002)
14) The Manufacture and Sale of Saint Einstein : The Propaganda of Supremacy,
    Christopher Jon Bjerknes(2006)
15)​ How Einstein Ruined Physics : Motion, Symmetry, and Revolution in Science, Roger Schlafly (2011)

아인슈타인의 저서

아인슈타인은 평생을 통틀어 수많은 책과 논문을 출판하였다. 대부분은 물리학에 대한 내용이며 몇 가지는 정치와 세상에 대한 견해를 담은 내용도 있다. 다음은 학술적인 내용 이외의 그의 견해를 밝힌 책이나 연설문의 모음집이다.
1) Albert Einstein (2005) [1934]. 《Mein Weltbild》 (독일어). Europa Verlag Znrich.  ISBN 3856655107
2) Albert Einstein (2007) [1934]. Alan Harris, 《The World As I See It》 (영어). Filiquarian Publishing, LLC. ISBN 1599868245 
3) Albert Einstein(1988).《Ideas and Opinions》 (영어). Bonanza Books. ISBN 05173937 
4) Albert Einstein (1993).《Out of My Later Years》 (영어). Gramercy. ISBN 05170938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